은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제자인 아폴로도로스가 친구로부터 들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이야기이다. 아폴로도로스는 매우 부유한 집안 출신이고 성격이 워낙 다혈질이고 비판적이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인정한 사람은 소크라테스 한 사람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아테네의 극작가)의 향연에 참석했다. 아가톤의 향연은 식사 후 아테네의 여러 신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였다. 에로스와 선과 미에 대해 논했는데 파이도로스와 에릭시마코스가 에로스야말로 가장 오래된 신이자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진 신이라고 했다. 에릭시마코스와 아카톤은 에로스가 선을 사랑하는 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정한 자를 멀리하고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주장했다. 에릭시마코스는 아테네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의료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난다고 믿었다. 사람의 영혼은 신이 내려주었고 그 영혼이 영혼의 감옥이라 불리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면 다시 신에게로 간다. 당연히 악한 일을 하면 신이 그 사람을 거부한다. 그 사람의 영혼은 이 지구를 떠돌게 될 것이다. 육체란, 다만 신께서 영혼이 천국에 갈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전까지 머무는 공간일 뿐이다. 상기설과 관련이 있는데 상기설은 무언가를 보고 다른 존재를 기억해 낸다는 이론이다. 사람은 쾌락이 있으면 고통이 있다. 쾌락을 떠올리면 고통이 따라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선과 악, 미와 추, 사유와 약탈 등등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상기설이 정설이라고 했다. 에서는 계속 영혼과 죽음에 대한 의..
편에서는 사형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절친한 친구 크리톤이 탈출을 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3장에는 소크라테스가 자기 죽음을 앞두고 오히려 밝은 분위기로 자신의 넓은 세계관과 사회적 관계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살리려고 사형집행 직전까지 계속 찾아왔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이 한 달 전에 확정이 되었는데 델로스로 배가 떠나면 돌아올 때까지는 사형을 금하게 되어 있었다. 델로스난 섬은 아폴로 신의 고향으로 아테네 사람들은 신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 배를 띄우는데 이 때문에 사형을 금지했다. 크리톤은 능력가의 부자라서 거의 못 하는 것이 없어 교도소도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 크리톤과 친구들은 끝까지 탈출을 권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탈..
아니토스 파의 입장에선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정말 골치 아픈 존재였다. 소피스트들 조차 자신들보다 많은 지지를 받는 소크라테스를 싫어했고, 아니토스의 민주정치에 반감을 가진 참주들과 부유층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했다. 그때 부유층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었다. 아니토스파와 그 추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성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꼬드겼다는 죄목을 씌웠다. 소크라테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재판정은 1차 표결에서 280대 220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두 번째 표결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 차인 360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정의를 위해 선택한 죽음 소크라테스는 당시 대권력가 아니토스의 사주를 받은 멜레토스의 모함을 받아 재판을 받았다. 소크..
소크라테스는 아고라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대방과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이 방식을 문답법 또는 '산'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과였는데 그래서인지 자신의 철학을 지적 산파술이라고 말했다. 지적 산파술이란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통해 그동안 아무런 반성 없이 지식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참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대화의 방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된 지식을 옳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만에 빠져 있다면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 자신의 지식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도록 하고 무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 중 특이한 점은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혼이나 답변을 내리지 않고 화가 끝..
악법도 법이다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아무리 불합리한 법이라도 법의 체계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격언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자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를 도우려는 많은 사람이 탈출할 것을 권유했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청소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그를 법정에 세웠지만, 정작 판결을 앞두고 드러낸 본심은 그에게 철학자로서의 언행을 그만두면 무죄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억울한 죽음을 선택하여 국가의 악법을 역설적으로 입증하였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더라면..
한밤중이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튿날 아침 일찍 산 너머 해변에 도착하기 위해 산등성이를 넘었다. '난 배를 탈 작정이다. 그 배들은 바다 건너 다른 곳으로 나를 태워 줄 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독한 방랑 생활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산등성이와 봉우리를 올랐던가! 나는 방랑자이며 높은 데를 오르는 자이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떤 운명이 내게 닥쳐오더라도 거기엔 반드시 고통이 따르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우리들의 체험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특별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의 체험은 그가 직접 겪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의 소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결국 모든 체험의 결과는 각자..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으로 들어가 동굴 속의 고독으로 돌아갔다. 그는 마치 씨를 뿌리고 난 사람처럼 싹이 트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그가 사랑하는 인간들에 대한 열망과 초조로 가득 찼다. '나에게는 아직도 그들에게 주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고독한 은자, 차라투스트라에게도 세월은 흘러갔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는 자라고 또 자랐다. 그러던 중 꿈에서 놀라 눈을 떴다. 거울은 가진 한 어린아이가 그에게 가까이 왔다. "오오, 차라투스트라여! 거울 속에 있는 그대를 보라."라고 했다. 거울 속에 보이는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악마의 찌푸린 얼굴과 비웃음이었다! 그 꿈은 경고였다. 지금 그의 '가르침'은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을 내려갔다. "가장 높은 행복이 ..
숲을 지나던 차라투스트라는 한 성자를 만났다. 몇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성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예전에는 혐오의 빛이 있었는데, 지금은 맑은 어린아이처럼 맑아졌다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한다고 했다. 성자는 인간들은 어리석으니 아무것도 주지 말고, 굳이 주겠다면, 그들이 당신에게 구걸하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인간들은 은둔자들에게 의심이 많으니 믿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성자에게 숲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성자는 날마다 노래를 짓고, 신을 찬미한다고 했고 자신에게도 선물을 달라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제발 그냥 떠나게 해달라고 하였고, 늙은 성자가 숲속에 있으면서도 '신은 죽었다'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에 놀랐다. '신은 죽었다'라는 차라투스트라의 ..
1. 니체와 차라투스트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로 현대 사회의 문화, 예술 분야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니체는 사유(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다. 사유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경우에 따라서 자유주의자가 되기도 했고, 심리학자가 되기도 했고, 예언자가 되기도 했다. 또 오늘날의 개그맨 같은 익살꾼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니체의 사상이 직접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로 불리기도 했다.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독일의 뢰켄에서 프로테스탄트목사인 카를 루트비히 니체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