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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 철학

고대 인류의 석학

펠릿 2023. 2. 5. 11:17

목차



    현실적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내용 중간마다 다양한 정치 체제 이론을 비판하며 좀 더 나은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지침을 논하려고 애썼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 자신의 의견과 상반되는 내용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플라톤은 "정치는 정의를 실현 시키는 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받아들였고,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었다. 반면에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서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를 부정하고 현실적인 국가의 모습을 연구, 제시하며 정치에 대해 연구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유일하게 이성을 지닌 동물이다." 이 말은 그 당시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을 정의하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즉 오늘날까지도 그 말이 통용될 만큼 인간에 대한 고찰이 현실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연구에 여러 학문 분야의 지식을 동원함으로써 정치학에 대하여 광범위한 개념으로 설명했다.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문으로서 정치학을 다루었다. 정치학을 홀로 분리된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 것이므로 정치학의 일부는 윤리학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는 그의 다른 저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물론 현대의 민주주의와 과거 그리스의 아테네 정치 체제는 똑같지 않다.
    하지만 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에 대한 개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사람들과의 생활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주장은 현재 우리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 제도에 찬성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그 당시의 인습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서는 지금도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우리가 수많은 책 속에서 좋은 책을 고르듯이 그의 주장 중에서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은 빼고 좋은 부분만을 알아나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고대 인류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최고의 사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C384년에 그리스 북부 지방 트라키아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아버지이자 알렉산드로 대왕의 할아버지인 아민타스 3세의 궁중 의사였다. 당시의 관습에 따라 의술은 가업을 잇는 전통적 직업이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의술을 배웠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영향으로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과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10살 무렵 부모를 모두 잃고, 그의 친척인 프로크세노 스가 후견인이 되었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17살이 되자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보냈다.
    아카데메이아는 기원전 387년경에 플라톤이 아테네 교외에 설립한 학교였다. 그 학교는 철학을 중심으로 수학,음악,  천문학 등을 가르치며 유능한 인재의 배출에 힘썼던 곳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20년 동안 지내면서 플라톤과 그의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곁에 오래 있었으나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과는 너무도 달랐다.
    스승이 명문 귀족의 후손에 완벽하고 정교한 세계를 이상으로 꿈꾸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반대로 평민 출신에다가 자신이 사는 현실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을 존경하고 따랐다.

    플라톤의 사상과 인품에서 깊은 감화를 받은 것은 분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에 머무르는 동안 플라톤의 방식대로 많은 대화편을 서술했고 아카데메이아와 경쟁한 이소크라테스 학파에 맞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다방면의 모든 영역에 관심을 가졌고 너무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아카데메이아의 예지(銳智 : 날카롭고 뛰어난 지혜)라고 불리면서 플라톤의 사랑도 흠뻑 받았다.
    하지만 플라톤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조카인 스페우시포스가 아카데메이아를 이끌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곧장 아테네를 떠났다.
    그에 대해서는 반마케도니아 감정이 싹터서라거나, 수학에 대한 스페우시포스의 편향성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기원전 348~47년, 이때 트로이 근처 아수스의 지배자였던 헤르메가 가스의 요청으로 아수스에 가게 되었다.
    헤르메이아스는 페르시아 군주들의 부하 신분에서 출발하여 소아시아 북서부 지방의 재정적,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한 인물로 한때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의 규범과 철학을 아시아 지방에 전파하고 싶었고 아카데메이아 분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칼케돈의 크세 노크 라텍스가 아수스로 가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3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지냈다. 제 7권의 12개 장을 쓴 것도 이때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후견자가 된 헤르메이아스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궁정에 기거하는 동안 헤르메이아스 조카딸인 페이디아스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정치학>에서 이상적인 결혼 나이를 남자는 37세, 여자는 18세라고 말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결혼했던 나이가 37세였다. 페이디아스가 18세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내는 오래 살지 못했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가 있는 동안에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얼마 후 헤라 필리스를 만났다.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니코마코스라는 아들도 얻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수스 아카데메이아에서 3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뒤 레스보스섬으로 옮겼고, 다시 수도 미틸레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친구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를 본떠서 철학 학파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