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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법도 법이다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아무리 불합리한 법이라도 법의 체계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격언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자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를 도우려는 많은 사람이 탈출할 것을 권유했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청소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그를 법정에 세웠지만, 정작 판결을 앞두고 드러낸 본심은 그에게 철학자로서의 언행을 그만두면 무죄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억울한 죽음을 선택하여 국가의 악법을 역설적으로 입증하였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더라면 적어도 극형인 사형선고는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이 무죄라고 당당하게 끝까지 주장함으로써 시민 재판관들의 미움을 샀다. 또 소크라테스는 사형이 아닌 국외 추방령을 택할 수도 있었으나 이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지인들의 탈출 권유와 함께 확실하게 석방될 기회마저 거부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는 자유와 이성적 사유의 결과에 따라 살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외침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젊었을 때 델포이를 여행했는데, 그곳에 있는 아폴론 신전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발견하고 어떤 계시를 얻었다고 한다. 정확히 번역하면 '너 자신을 아는 것 배워라.' 라는 뜻을 가진 이 말에서 그가 어떤 계시를 받았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나중에 고발당하여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신으로부터 받은 그의 사명을 밝혔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전문가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이름난 사람들을 상대로 증명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라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고백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지혜가 신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무지함을 아는 반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면서 그는 일생 아테네에 살면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교육에 전념했고 소피스트들과의 논쟁을 즐겼다. 특히, 그는 지식과 기술의 일방적 주입을 지양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반성과 자각을 유도하는 변증법적인 논술 기법을 애용했다. 마치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들을 향해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자주 입에 올린 것도 그러한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아니토스 일파'는 왜 소크라테스를 고발했을까?
    소크라테스를 직접 고발한 사람은 펠레토스라는 사람이었지만 사실상 그 뒤에는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니토스 일파가 있었다. 아니토스는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았던 30인 참주정치에 맞서 아테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한 민주투사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시민들의 화해를 위해서 자신들을 괴롭힌 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아니토스' 일파가 일흔이 다 된 가난한 철학자를 법정에 고발하여 사형까지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테네 사회는 원래 상당히 아량 있고 관용적인 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404년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영토도 작고 인구도 얼마 되지 안았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에서 패한 상처를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했다. 평소 권력자나 지식인 등을 비관하며 그들의 미움을 샀던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 적임자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으로 인해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니케 신전 등 많은 건축물들이 파괴 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최고의 명문 출신이었지만 귀족파가 아닌 민주파의 지도자가 되어 귀족 세력의 권리를 박탈하고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아테네 민주정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아테네 최전성기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정말 악처였을까?
    소크라테스의 말로 전해지는 경구 가운데 유명한 말이 있다. 그것은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결혼은 하는 것이 좋다. 양처를 만나면 행복해질 테고,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테니..."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는 악처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크산티페에 대해서는 가장 유명한 철학자의, 소문난 악처라는 말이 전해지지만 그녀가 실제로 악처였는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리스토파네스를 비롯하여 후일 소크라테스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온 일화이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쓴 책에는 크산티페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와의 사이에 람프로클레스, 소프로니스코스, 메네크세노스 세 아들을 낳았고, 소크라테스가 죽던 당시 막내 메네크세노스는 아직 어렸으며, 낙담한 크산티페가 그 막내아이를 품에 안고 남편을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것은 대체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파이돈>에서 크산티페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슬퍼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평범한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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