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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토스 파의 입장에선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정말 골치 아픈 존재였다. 소피스트들 조차 자신들보다 많은 지지를 받는 소크라테스를 싫어했고,  아니토스의 민주정치에 반감을 가진 참주들과 부유층 젊은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했다. 그때 부유층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었다. 아니토스파와 그 추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신성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꼬드겼다는 죄목을 씌웠다. 소크라테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재판정은 1차 표결에서 280대 220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두 번째 표결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 차인 360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정의를 위해 선택한 죽음
    소크라테스는 당시 대권력가 아니토스의 사주를 받은 멜레토스의 모함을 받아 재판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신성 모독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으로 이끌었다는 사악한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그는 그 자신이 죄인이고 변호사라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자체에는 상당한 깊이의 철학이 담겨 있는데, 모두 글로 기록되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제목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는 시장과 신전에 나가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지만, 모독이나 탈선을 이끈 적은 없다고 변론했다.  아폴론을 섬기던 델포이 신전에서조차 그를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추켜세웠는데, 델포이 신전은 당시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던 그리스 젊은이라면 모두 우러러보는 곳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마치 신인 양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으며 신을 섬기는 자연철학자들을 무시하라고 했다는 누명도 썼다. 당시 자연 철학자들이란,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철학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연법칙은 때로는 맞는 것도 있지만 한 가지 법칙을 가지고 너무 많은 이론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달이 지는 것을 보이고 사람의 죽음과 똑같다고 하고  달이 뜨는 것을 보고 사람이 부활했다고 여기는 점이다. 아니토스 파의 일원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의 본업이자 주특기인 연극무대를 통해 소크라테스를 계속 조롱했다. 당시 소크라테스를 공격한 사람 중에는 소피스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히포니코스의 아들인 칼리아스의 말에 따르면 에우에노스라는 소피스트가 돈을 요구했다고도 누명을 씌웠다. 칼리아스는 그리스 최고의 부호로 손꼽히는 사람으로 그의 아들들을 에우에노스라는 학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대신 돈을 지불해야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혜나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니, 스스로 잘난 척하는 사람들보다는 겸손하다고 했고, 그 누구보다 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신 다음으로 소크라테스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웠다고, 젊은이들을 광장에서 현혹시킨다고 멜레토스가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멜라토스에게 현명하고 가장 적합한 젊은이들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멜라토스는 국법이라고 했다.  "자네는 500명의 재판관들을 젊은이로 생각하는가?", "평의회 의원들, 국민의회 의원들도?"라고 질문했다.

    당시 아테네는 부족에 따라 10구로 나누고 1구에서 50명씩 500명의 평의원을 뽑아 대부분 국정을 운영토록 했다. 국민회의는 20세 이상의 아테네인 모든 남자로 구성된 의결 기관이었다.

    멜레토스는 지도자들이니 당연히 선도자들이라고 대답했다. 멜레토스는 젊은이들의 선도나 올바른 지도에 관심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왜냐하면, 평의원들은 바쁜 국정운영으로 젊은이들을 대할 수 없고 국민회의는 아테네 젊은이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를 항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판을 보고 듣는 모든 이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다. 젊은이들에 대한 올바른 지도나 가르침보다는 많이 알고 내세우는 데 익숙한 잘못을 지적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다음 항변에서 포티타에아, 암피폴리스, 델리온에서 용감한 병사로 종군한 격전지를 예로 들었다. 그는 조국 아테네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이었고 사람은 덕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비판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선의 길로 들어서길 바라는 그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를 멀리 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평의원으로 2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지만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했다. 정치에는 각종 비리와 부정행위가 따를 수밖에 없고 구정물 속에서 구정물을 맑게 할 수 없듯이 개인적으로 사회정화에 나섰다. 바로 그 점이 아니토스파의 미움을 샀다. 아니토스파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아테네 여론을 좌지우지했다. 사실 멜레토스도 화가 출신으로 아니토스파가 내세운 허수아비 대리인이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때 비겁하게 위기를 피하는 사람이 아님을 소크라테스는 증명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은 소아시아의 해안에서 멀지 않은 아르기누사이 섬 근처에서 일어났던 펠로폰네소스전쟁 말기의 해전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해전에서 죄 없이 유죄 판결 받게 된 아테네 장군 6명을 구하기 위해 500명의 평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그들의 사형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의 대표적인 신조 중에 하나는 바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이 나를 따라주었고, 그의 아들들도 항변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일로 주변사람들을 이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증인은 최소한의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만약에 죽음을 선택하여 정의가 실현될 수만 있다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택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보다 나은 철학과 사상을 전파하는 데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