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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아고라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대방과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이 방식을 문답법 또는 '산'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과였는데 그래서인지 자신의 철학을 지적 산파술이라고 말했다.

    지적 산파술이란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통해 그동안 아무런 반성 없이 지식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참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대화의 방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된 지식을 옳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만에 빠져 있다면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 자신의 지식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도록 하고 무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 중 특이한 점은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혼이나 답변을 내리지 않고 화가 끝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난다.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이 의문을 가지고 바른 대답을 얻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본래적 의미는 진리에 대한 인식보다는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상대방의 실천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아고라 광장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광장인 아고라는 아테네의 정치 종교 문화적인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장이자 사회 생활의 무대였 다. 아크로폴리스가 참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다면 아고라는 일상적인 시민 생활의 중심지였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처음으로 아테네에 철학을 이식하여 엘레아학파의 출현에 의한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위기를 구하려고 하였다. 생성과 소멸이란 개념을 부정하고, 만물은 처음부터 존재하였으며, 다만 그 혼합과 분리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아테네에서 활약하다가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은 것이 나중에 소송에 휩쓸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원래의 만물은 혼돈의 상태였는데, 지성의 작용으로 인해 회전운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확대되어 여러 가지 갈래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향연>에서는 어떻게 정의했는가? 에로스(Eros)를 어떻게 정의했는가?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이다. <향연>에서 묘사되고 있는 에로스에 대한 입장은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신적인 사랑 속에 무게를 둔 경향이 있다. 무녀(巫女) 디오티마가 언급하는 사랑이란 육체적으로는 생식을 통해서 이뤄지고 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후손을 남겨 자신의 삶을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본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에 비추어 올바른 인간의 길을 제시한다. 사람은 어릴 때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해 명상한다. 그런데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해 명상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이 아름다움이 사소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영혼의 아름다움, 즉 지혜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지혜에 대한 명상을 지속하면 어느 순간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는 아름답고 누구에게는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며, 어느 순간에는 아름답고 어느 순간에는 덜 아름다운 것도 아닌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한 번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한 사람은 육욕과 색정 따위를 멀리하게 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일체가 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의 미에 대한 추구에서 영혼의 미에 대한 추구로 승화되고, 마침내 미 자체의 관조에 도달하는 것이 연애의 올바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디오티마(Dictima)
    플라톤의 <향연 (響燕)>에 등장하는 전설상의 인물로 무녀(巫女)이다. 작품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녀와의 대화 내용을 통해 에로스 예찬의 연애관을 말하는데, 처음에는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가 아름다움 그 자체의 관조까지 도달하는 것이 올바르고 긍정적인 연애의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일화 -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제자인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잘 알려진 인물인데, 서양 철학의 3대 대가 중 한 분이다. 그는 외모와는 달리, 서양 철학의 지. 덕. 복 합일설을 완성했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아테네에서 조각일을 했고,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아기 돌보는 일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어린 시절에 소피스트들로부터 체계적으로 철학과 사상공부를 익혔다. 소피스트(sophist)란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주로 법칙이나 웅변술을 가르쳤다. 소피스트와 같은 학자들 덕분에 당시의 광장 토론 문화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이면서도 소피스트를 가장 많이 비판했던 사람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내면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자주 찾았고 그를 따르는 시민들도 매우 많았다. 나중에 소크라테스의 애제자가 된 플라톤도 이 모임에서 만났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였는데 그를 박대하고 무시한 악녀로 소문이 자자했다. 악처가 훌륭한 철학자를 만든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차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BC431년에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BC431년에서 404년까지 당시 강대국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스파르타에 패배한 아테네는 과거의 민주 정권이 몰락하고 지주 중심의 참주 30명이 통치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참주 정부는 돈과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괴롭혀서 민심을 잃었다. 아니토스가 주축이 된 쿠데타 세력은 참주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민주정치를 선언했다. 당시 지도부는 능력보다는 인기에 영합한 사람들을 주로 뽑았고 현대에는 이런 형태를 가리켜 포퓰리즘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