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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은 플라톤의 위대한 저서이자 방대한 양의 저술로도 유명하다. 원제목은 <폴리테이아>이다. 모두 10권이고 형이상학, 정치사상, 예술론 등의 다양한 주제가 있다. BC 5세기는 중국의 공자, 인도의 석가모니,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대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플라톤은 스무 살 즈음 친척 어른의 소개로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귀족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플라톤도 정치가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좋은 정치가가 있어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는 모습을 보고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것은 신(神)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플라톤은 인간존재의 참뜻이 되는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이 <국가론>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이른바 페리클레스의 전성기를 지나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하면서 점차 몰락해 가던 때였다. 그리스의 가치관을 방어하고 정의로운 아테네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국가론>의 1권과 2권에서 '정의(올바름)'에 대해 논의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의 정의는 우주와 자연은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1권에는 '올바름'에 대한 토론
2권에는 국가에 대한 정의
3권에는 시가의 문제와 모방의 개념을 설명, 교육 방법에 대한 논의
4권에는 지혜와 용기 있는 자, 절제하는 자들을 구분하여 국가에서 맡는 지위와 역할에 대해 - 정의로운 국가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5권에는 수호자들의 공동생활, 재산과 어린이와 여자의 공유, 남녀평등과 권리 철인 통치자의 필요성에 대한 내용 - 특히 교육에는 어린이나 남녀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양성평등을 강조했다.
6권에는 철학자가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논의 - '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했다.
7권에는 '좋음의 이데아'와 앎의 대상들, 그리고 앎의 단계들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8권에는 여러 가지 정치 체제에 대한 논의 - 귀족정치를 최상의 정치 체제로 여겼는데 변질하여 금권, 과두, 민주, 참주 정치 체제가 등장하는 과정도 보여준다.
9권에는 참주 정치 체제를 닮은 사람의 탄생과 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0권에는 시와 훌륭함(덕)에 대해 논의했는데, 완전한 국가에서는 시가 아니라 철학이 교육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플라톤은 정치란 학문이고 기술이므로 지혜를 갖춘 철인(철학자) 군주만이 자격이 있다고 하여 금권 정체(경제력이 있는 소수의 부유한 계층이 지배하는 통치 형태)를 주장했고, 민주주의 국가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싫어한 이유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민주제에서 지도자가 결정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무나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플라톤이 민주제를 과두제보다 못하다고 한 것은 당시 아테네의 정치 상황은 아주 혼란스러웠고, 우매한 대중들에 의해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민주 정치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최초로 실시했다.
페르시아 전쟁에 시민들이 참여하여 승리하자,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많아졌다. 그래서 귀족들만 오를 수 있었던 최고 관리인 아르콘 자리에 시민들도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정치적인 특권을 누려 오던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고, 이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에서 그리스 패권을 놓고 한판 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아테네 귀족들은 아테네를 떠나 스파르타 편에 섰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고, 스파르타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을 아테네의 지도자로 올렸다. 이렇게 해서 감투를 쓴 사람들이 바로 악명 높은 30인의 참주들이었다. 이들 주에는 플라톤의 외가 쪽 외삼촌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도 있었다. 하지만 1년 만에 시민들의 반정이 일어났고,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시민들이 처형했다. 결국 플라톤은 민주주의파에 스승과 친지까지도 잃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플리톤의 사상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았다.
정의로운 국가의 미래는 정치가 아닌 교육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플라톤은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를 떠났다. 40세가 된 플라톤은 시칠리아 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시라쿠사에서 참주인 디오니시오스 1세를 만났고 <국가론>에 나오는 참주가 '디오니시오스'이다. 하지만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와 플라톤은 점점 사이가 벌어졌고, 그는 플라톤을 노예시장에 팔았다. 다행히도 플라톤은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로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제자도 키우기 위해 아카데미를 세웠다. 이 '아카데미'라는 말은 그 후로 과학, 문학, 미술 등을 연구하는 학술 단체나 학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디오니시오스 2세가 왕이 되고, 디오니시오스1세의 처남인 디온은 조카인 디오니시오스 2세에게 철인사상을 주고자 플라톤에게 편지를 써 디오니시오스 2세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했다. 플라톤이 시라쿠사로 갔을 때, 이미 정치적 음모로 가득 차 넉 달 만에 디온은 역적모의로 추방되었고, 디오니시오스 2세는 철인 사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 시칠리아에 전쟁이 일어나서 플라톤은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다. 4년 후 다시 시라쿠사로 갔지만 여전히 철인 통치와는 거리가 멀었고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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